전라북도 진안에있는 이재명 의사 기념관 앞 동상
1910 년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는 한 젊은 대한민국 청년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이름은 "이재명" 죄명은 모살미수및 고살범(고살(故殺)"일부러 사람을 죽임)
순국직전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1909년 12월, 서울명동 북달재 천주교회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완용이 여기에 참석한다는 것을 안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가장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추도식을 마치고 이완용이 교회 정문을 나설 때 이재명은 마차에 뛰어올라
이완용을 복부와 허벅지등을 마구 찌렀다 .
여러 차례의 칼을 맞은 이완용이 길 위에 실신하자,
이재명은 그가 완전히 죽은 알고, 군중들을 향하여 만세를 부르고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다 ...
그러나 명이 긴지 이완용은 죽지않고 이재명은 체포 되고 말았다 '''
체포된 이재명 의사는 이듬해인 1910년 9월 13일,
찬송가 444장 " He leadeth me (주 나를 인도하시니) "를 부르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 스무 살이였다 ..
당초 계획은 이토 히로부미의 평양 방문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하려고 평양역에 대기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단념했다,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되자
목표가 사라진 그는 다시 친일매국노 이완용을 목표로 삼았다 ..
그래서 결국 이완용을 죽이기로 한것이다 ...
같은 민족끼리 칼부림을 해야하는 상황
돌이켜보면 일제36년의 역사에서 일본이 난폭하기도 했지만
우리측의 실수도 많았던것 같습니다 ,
을사 오적같은 역적이나 배신자 변절자 같은 사람만 없었다면
일본이 아무리 짓밟아도 그렇게 쉽게 멸망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옛어른들의 일본 식민지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사람보다 한국 사람이 더 무서웠다고 합니다 ...
고을마다 한국인 비밀요원을 만들어 놓고 수시로 감시하고 신고를 하니
당연히 한국사람이 더무서운거죠, 항상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이 딱맞는 대목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감시한다는게 얼마나 피말리는 일입니까 .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거나 마찬가지니까요 ..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도가 영국에 멸망할 당시에는 인도의 지주계급들에 의한 민족 배신이 비일비재했고,
중국 또한 아편(阿片) 몇 덩어리에 민족을 배신한 사람들이 있었죠
대한제국 멸망에 있어서도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형사(刑事)의 끄나풀에 이르기까지
조선 민족의 멸망에 동조한 인물이 의외로 많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쳐들어오는 적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적을 먼저 쳐부수는 것이
민족을 구하기 위한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이재명(李在明) 선생의 정신에 대해서
더욱 추모의 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6.25나 8.15의 의식이 점점 잊혀져가는듯 하지만
역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
이번 광복절에는 아니 이번뿐만이아니라 나라에서 국기 계양을 하라고 지정한날은 꼭 계양을 합시다
국기를 다는것부터가 애국의 길입니다
보기도 좋고, 애들도 배우고 ,마음도 새롭고...
이재명 의사
이재명 의사 의거 터
명동성당 정문에서 카톨릭 회관 사이에 위치
감사합니다
- 자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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